만원의 행복
민수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 친구가 저녁에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고 있는데,
앞서 길을 걷던 3명의 사내들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랍니다
"내, 오늘도 안 줬으면 휘발유통 들고 찾아가려고 했어.. 딸꾹"
대충 들어보니 건설현장 노동자로 보이는 사내들은 밀린 월급을
어렵게 받아낸 듯했습니다
언뜻 보이는 옆 얼굴이 김치찌개 국물처럼 붉게 물들었고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걸로 보아 어지간히 취한 모양이었습니다
"아.. 이놈의 세상..딸꾹.. 돈이 웬수야 돈이.. 딸꾹"
가운데서 걷던 사내가 갑자기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 들더니 만 원짜리 한 장을 빼내 땅바닥에 패대기쳤습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질퍽거리는 진흙탕에 처참하게 버려진 지폐 위로
구두 뒷굽을 올리더니 팽이 돌리듯 몸을 한 바퀴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혀꼬인 소리로 하늘을 향해 뭐라고 몇 마디 더 내뱉은 사내는
호기롭게 팔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스산한 초겨울,
잿빛 하늘에서 비가 부슬부슬 내려 땅이 젖어있었고 깔끔 떠는 아가씨들은
어느 새 하나 둘 우산을 펼쳐들었습니다
문제의 만원짜리가 어찌될까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걷고 있는데
지나는 행인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지폐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길 가던 행인들이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
사내가 저지른 행동을 똑똑히 보았으므로 차마 손길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수도 진흙탕 옆을 지나면서 처음엔 동네사람들 시선도 있고해서
그냥 지나치려 하다가..
막상 가까이서 진흙 사이로 빠져나온 푸른 지폐 조각을 보니
그것은 마치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터에서 중상을 입은 채 외로이
참호에 쓰러져 죽어가는 병사의 푸른 옷소매처럼 애잔하게 느껴졌습니다
민수는 버림받은 만원을 구원하리라 결심하고는 뒷주머니에서
그저께 다림질하고 나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분홍빛 손수건을 펼쳐
지폐 모퉁이를 잡고 진흙탕에서 빼내 손수건으로 감싼 채 집으로 향했습니다
샤워기로 진흙을 씻어내고 세탁기에 넣어 다른 빨래와 함께
돌린 다음 다리미로 몇 번 왔다갔다하니..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빳빳한 새 지폐가 되었습니다
"이제 넌 다시 태어난 거야, 예전의 어둡고 아픈 기억은 모두 잊으렴.
앞으로 한 장의 지폐로써 유효기간이 다하는 날까지 지구라는 무대에서
연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아름답고 행복한 여행을 하기 바란다"
다음 날 아침, 거리의 자선 냄비에 만원을 넣은 그는
소녀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뒤로하고 군중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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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는 우리 모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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