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강쥐와 하룻밤을 보내다
낯선 강쥐와 하룻밤을 보내다
마트에 갔다가 물품보관소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애완견 보관함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고 아이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들어보니 강아지는 며칠 전 근처 초등학교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먹을 것을 주며 같이 놀아주었다고 합니다
며칠이 지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아이들도 어찌해야 할 지 몰라 서로
상의한
끝에 여기 애완견 보관함까지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료 한 줌과 물 한 컵을 앞에 두고 녀석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얌전하게도
앉아
있었습니다
마트 관리자는 영업시간이 지나면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을 했고 누군가는 경찰에
신고하자고 하였으며 또 동물 보호소에 보내자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동물 보호소?
그렇지,거기라면 잘 알아서 돌봐줄 것이고 또 새 주인을 만날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핸드폰으로 114를 거쳐 가까운 관할 동물 보호소로
전화하였습니다
간단히 사정을 이야기하고 위치를 알려 주었더니 오늘은 시간이 없고 내일이나
나올 수 있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오늘 밤`이었으니..
너희들 중에 누가 얘와 오늘 밤 같이 있어줄래?
아이들 얼굴엔 그늘이 스쳤습니다
그럼, 이렇게 할까?
근처에 아저씨 직장이 있으니 거기서 데리고 있다가 내일 보호소로 보내기로 하자
아이들의 동의를 얻은 후 1000원짜리 예쁜(싼) 목줄을 사서 강아지 목에
걸어주고
회사로 향했습니다
아직 퇴근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사무실 직원들 눈을 피해 비상엘리베이터로
지하 숙직실로 직행하여 한쪽 귀퉁이에 목줄을 묶어두고 신문지 위에 아이들이 준
사료와 종이컵에 물을 담아놓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약 스무걸음 쯤 걸었을까?
멍! 멍! 멍! ...
지하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는 저 소리는 분명 방금전까지 같이 있었던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틀림없음을 깨달은 저는 100M 달리기 하듯 숙직실로 몸을 날렸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얌전해지는 강아지.. ㅜㅜ
할 수 없이 사무실에는 적당한 핑계로 둘러대고 이제 녀석과 저는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세면장으로 데려가서 비누칠을 하고 샤워기로 몸을 씻어준 후 드라이기로
털을 말렸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을 먹이고 복도를 산책하고 화장실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제가 뛰면 같이 뛰고 걸으면 같이 걸었으며 계단을 세 칸 오르면 그도 세 칸을
올랐습니다
함께 TV를 보다가 라면 박스위에 신문지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저는 침대 위에 누워 잠이들었습니다
멍! 멍! .. 짖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니 녀석은 어디가 불편한 지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이다가 제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몸을 둥글게 만들어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새벽 2시..
저는 누운 채 녀석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네 이름이 뭐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널 버린 주인을
원망하니?
어스름한 불빛,시간이 멈춰버린 듯 적막이 흘렀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막 잠이 들려는 찰나,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인님..]
...
[주인님..]
누구.. 누구세요..
[접니다. 주인님]
지금 네가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네. 아니 말을 한다기보다 생각이 서로 통한겁니다]
이게 꿈은 아닐까?
[꿈이 아닙니다. 주인님과 제 생각의 파장이 맞은겁니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생각의 채널이 열린겁니다]
믿을 수가 없어, 일어나서 널 보고 싶은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마음을 편안히 가지세요. 주인님과 저의 대화 채널은
아마 곧 닫힐 것입니다. 시간을 아껴야 해요]
...
[제 이름은 `쉬리`입니다]
쉬리.. 그건 물고기 이름 같은데..
[예. 깨끗한 물에만 사는 토종 물고기죠. 제가 목욕하기를 싫어해서 쉬리처럼
깨끗하게 살라는 뜻으로 전 주인님께서 그렇게 지어 주셨어요]
쉬리.. 특이한 이름이네
[저의 전 주인님은 머리를 어깨위로 늘어뜨리고 수수한 옷차림을 좋아하는
마음이 여린 여자분이셨어요. 2년전 남자친구로부터 절 선물받았죠. 저는
두 분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함께 차를 타고 드라이브도 하고 경치 좋은
해변으로 여행도 다녔어요]
[그러다가 두 분이 헤어지면서 제 생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는데 그녀는
간혹 저를 노려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저를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리셨죠]
[그러던 어느 날 저를 미용실에 데려가 발톱을 다듬고 털도 예쁘게 깎아
주시더니 차를 타고 멀리 낯선 동네에 내리셨어요. 제 얼굴위로 그녀의 눈물이
떨구어졌을 땐 저도 슬퍼졌어요. 그녀는 돌아서서 흐느끼더니 혼자 차에
올랐어요. 저도 타려고 했지만 문이 닫힌 뒤였죠]
그랬었구나..
[저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요. 지난 2년간 저를 사랑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비록 저를 버리셨지만 저는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하나 있거든요]
그게 뭐지..
[...]
말해줘.. 뭘 모른다는 거지..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녀석은 조그맣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저는 신비로운
기운에 젖어 쉽게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후배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고 오늘 오후에 동물 보호소에서 데리러
올 것이니 그 때까지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 후 저는 쉬리와 작별해야
했습니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니 후배 직원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동물 보호소에서는 일주일간 주인을 기다렸다가
나타나지 않으면 해당 동물을 `안락사`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안락사.. 저는 이 말을 생각하기도
싫었습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입맛이 없었고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기분이
착잡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쉬리에게 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동물 보호소에서 오신
분이 쉬리를 이리저리 만져보시더니 대장이나 항문쪽에 문제가 있어서 뱃속에
변이 쌓여 배가 부풀어 오른 상태라고 하셨답니다
어쩐지 신문지를 깔아줘도 변을 안 보고 밤에 잠을 잘 때도 어딘가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더니 그게 다 배가 아파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며칠동안 생명,죽음 이 두 단어가 머리속을 맴돌았고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알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주일 후에 지하 숙직실로 내려갔을 때였습니다
숙직실 문을 열자 저만치 앞에 쉬리가 있었습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의 눈에 그가 보였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걷는지 뛰는지를 맹세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니었지만 생전의 모습 그대로 몸의 윤곽을 따라
희미한 빛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 날 먹이와 물을 놓아두었던 곳에서 이리저리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저를 발견하더니 있는 힘을 다해 제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나의 거리는 약 30M 정도 되었는데 저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다가는
어딘가에 부딪혀 다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거리가 10M 정도로 가까워오자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제 가슴
높이로 훌쩍
뛰어 올랐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제 몸 주변의 오라(Aura)가 열리더니 그와 나의 오라가 합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다시 설명하자면, 대개 인간의 오라는 일곱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일곱개의 층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을 나타내며 자기 몸으로부터 7M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당시 제가 느낀 오라는 마치 반경이 5~6M 되는 커다란
훌라후프처럼 단순한
모양이었고 색깔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합쳐지는 순간은 커다란 호수에 작은 돌맹이를 던지는
것처럼 잔잔한
파동이 일었으며 이 모든 것이 1~2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라가 순식간에 없어지고 주변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때의 경험은 잊을 수가 없군요
2005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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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와의 대화 부분은 픽션이며 나머지는 실제 겪은 일입니다)